[진이, 지니] 그리고 민주: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소설가의 '진이, 지니'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화재 현장에서 불법 사육된 보노보를 구출해 오던 영장류 센터 소속의 차가 낭떠러지로 구릅니다. 차 안에 있던 사육사 '진이'의 의식이 보노보, 지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 이야기의 악당 자파가 요술램프로 빨려 들어가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요.
영혼을 끌어 들이는 요술램프
사고가 나기 직전 구출된 보노보를 '지니'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게 된 진이는 이제부터 지니를 통해 행동하고 보고 사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모릅니다. 혹시 그것이 이유가 됐을까? 지니는 오래전 진이가 콩고에 있을 때 만난 적이 있던 보노보입니다. 지니와 몸을 공유하게 된 진이. 진이는 지니의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지니의 무의식 속 과거의 기억을 여행합니다. 무리의 모습, 밀렵되던 순간, 컨테이너선을 타고 한국으로 옮겨지기 까지.
진이, 지니 그리고 민주
진이와 엮이게 되는 떠돌이 백수가 있습니다. 김민주. 보모로 부터 독립을 강요당한 30살의 백수. 아직 정신적으로도 독립을 못한 미성숙한 청년입니다. 집을 벗어나서 비로소 세상을 배우게 되고 세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을 조금은 늦게 겪는 것일 뿐입니다. 지니의 몸속에 갇힌 진이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민주는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소설 속 민주의 행동들은 어리숙하기도 하고 철부지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탈출한 보노보를 도와줘야 하는 책임(표면적으로는)을 얻게 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진이. 결국 모든 인간은 그 끝을 마주하게 됩니다. 누구도 그 마지막 순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 줍니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용기를 내서 스스로의 죽음을 덤덤하게 맞이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 가슴에 뭉클했습니다.
천재 작가의 스토리텔링
정유정 작가는 섬세합니다. 모든 독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상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섬세한 문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그 허구의 감옥에 사로잡힌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니의 몸속에 옮겨간 진이가 인간과는 다른 보노보의 발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의식이 보노보 지니의 몸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들은 허구의 세상과 허구의 캐릭터들에게 당장 어제 일어났을 법한 생생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에서는 파리 한 마리도 멋대로 날게 할 수 없다는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그런 세세한 표현은 꼭 그녀의 다른 베스트셀러 작품들과 같은 스릴러 소설에서만 장점을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책들이 결말에 다다를수록 어떤 엔딩을 맞이할지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진이, 지니'도 진이의 운명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타인을 통해 비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손가락 총으로 인사를 나누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여운이 오래 남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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